<우리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5세기 이탈리아가 낳은 유명한 화가, 조각가, 건축가, 그리고 과학자이다. 그가 43세 때에는 화가로서 이름이 나 있었다. 밀란의 두도 빙코공은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만찬의 모습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온갖 정성과 심혈을 기울여 마지막 만찬을 완성했다. 열두 제자를 세 사람씩 무리지어 놓고 중앙에는 예수께서 오른 손에 잔을 들고 계시고 양쪽에는 제자들을 각기 여섯 명씩 그려 놓았다.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는 으레 그렇듯이 절친한 친구를 불러 그림을 보여주며 의견을 들어 보았다. 그림을 본 친구는 깜짝 놀랐다. 최대의 걸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주님의 손에 들려진 은잔이 어찌나 섬세한지 그 잔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다빈치는 그 말을 듣고 붓을 들어 은잔을 지워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 그림에서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어떤 것도 중심이 될 수 없네.” 그의 그림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였는데, 모든 것을 다 잘 하려다가 중심이 은잔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주연과 조연이 뒤바뀐 것이었다. 중심이 뒤바뀌어진 그림은 이미 생명을 상실한 것이 되고 만다.
우리 삶의 내용들을 펼쳐보면 내 생활에서도 중심에 무엇이 와 있는가? 하고 생각하면 반성할 점이 많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구주로 믿고 고백은 하면서도 사실은 중심에 예수가 아니라 다른 것이 자리 잡고있는 경우가 많다. 전도지 가운데 4영리 전도지가 있다. 그 내용 가운데 의자가 가운데 있고 의자 위에 앉아 있는 그림이 하나는 십자가, 다른 하나는 “나” 라는 그림이 있다. 즉 십자가가 의자에 앉아 있는 그림은 예수가 내 마음에 가운데 계시고 나는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그림이지만 반대로 “나” 라는 것이 가운데 앉아 있는 그림은 내가 중심, 자아가 중심이고 예수는 변두리이다.
우리들이 신앙을 하면서도 예수는 조연이고 우리가 주연처럼 생각 되어질 때도 많다.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들의 일상 속에서 진정으로 예수가 중심에 와 있는가? 아니면 다른 무엇이 중심에 와 있는가? 항상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당구에 한창 열중하고 빠진 사람은 모든 관심이 당구라는 것이다. 버스를 타도 승객들의 머리가 다 빨간 공, 하얀 공으로 보이고 해서 버스 안에서도 연습을 한다고 한다. 얼마나 몰두하고 좋으면 그럴까? 우리가 예수를 그 정도는 믿어야 되는데 우리는 그렇지를 못하다. 우리들의 관심 중 아주 작은 일부분에 예수가 있을 뿐이다. 그보다는 다른 것들이 더 중심에 서 있고 주연이다. 변두리의 관심에서 중심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이 신앙에 관건이다.
20세기 유명한 신학자였던 틸리히는 종교를 궁극적 관심이라고 했다. 즉 그 사람이 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그 사람이 종교를 말한다고 한다. 맘몬이 그 사람을 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하면 그는 맘몬이즘이고, 어떤 이데올로기가 관심의 최고가 되면 그 사람의 종교는 이념이라는 것이다. 그의 논리로 본다면 우리가 기독교를 신앙으로 삼고 살아간다고 하면 우리에게는 적어도 최고의, 궁극적인 관심이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는 그렇지를 못하다. 우리의 관심은 예수가 최고 아니고 다른 주변이 최고의 관심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교회 안에 있는 것으로, 기독교인이라는 것만으로 안주하고, 안위하려고 한다. 이제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무엇보다 진정한 기독교인 회복이 필요하다. 내 중심에 예수가 계시는 삶이, 생각이 필요하다.
댓글0개